공간의 마법사‘정리수납’ 프랜차이즈로 꽃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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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의 마법사‘정리수납’ 프랜차이즈로 꽃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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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6.12.01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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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덤인 정경자 대표
▲ (주)덤인 정경자 대표 캐리커쳐 원소정 작가

고용노동부에서 걸려온 한 통의 전화, 눈물이 핑 돌다
#. 캐나다 토론토 고속도로에서 눈물을 쏟았다. 사방이 모두 허허벌판인데다 인적이 전혀없는 적막한 아스팔트위의 노을이 차창에 부딪치면서 와락 서러움이 밀려들었다. 캐나다는 인건비가 비싸 수리나 보수를 잘 안하는 곳이다. 회사에서 고용한 운전기사가 커피숍 간판을 파손하는 바람에 통으로 갈아줘야 하는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아직 자리를 잡지못한 물류회사 해외법인의 대표로 나와 있어 어떻게든 비용을 절감해야 했다. 한국의 30대 여성 CEO는 통사정하며 빌다시피 해 마무리를 지었다. 3시간 넘는 고속도로 귀가길에서 갑자기 자신이 처량해 보였다. 내가 여기서 왜 이러고 있나. 서울이 떠올랐다.

#. 정형외과 병원을 찾았다. 계단을 오르내릴 수 없을 정도로 무릎에 통증이 심해 견디다 못해 입원했다. 연골이 다 닳았다는 진단이 나왔다. 나이로 치면 80세노인 수준일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라는 얘기였다. 이제 40대 초반인데 말이 안 나왔다. 지난 3~4년간 뒤돌아 볼 틈도 없이 앞만 보고 달려온 결과였다. 부산, 광주, 춘전 등 우리나라 전국을 무대로 강의하기 위해 장거리 운전을 하고 하루 기본으로 6시간은 물론이고 심할 때는 10시간 이상을 ‘정리수납’ 강의를 하기 위해 서 있었다. 훈장 같은 후유증이다. 

#. 단풍이 짙게 드는 2014년 10월 말경, 고용노동부에서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지금까지 주부들의 가사노동 정도로 치부해 왔던 ‘정리수납 전문가’를 한국직업능력개발원의 직업사전에 정식으로 등재하게 되었다는 소식이다. 믿기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물었다. 정말인가요. 그렇다는 대답이 전화선을 타고 또렷이 귓가에 닿았다. 벅찬 감동이었다. 그동안 이 대답을 듣기 위해 무릎이 닳고 바이러스에 걸리고 병원에 입원하는 등 얼마나 뛰었던가. 직원들과 함께 와! 했던 함성이 아직도 귓가에 맴도는 듯하다. 새 직업의     탄생은 그렇게 고진감래 끝에 다가왔다. 2015년 2월이다.

▲ (주)덤인 정경자 대표 ⓒ사진 이현석 팀장

정리수납을 직업으로 만든 개척자.....최고의 이론가
국내 정리수납의 개척자이자 최고의 이론가이며 필적할 수 없을 정도로 실무에 정통한 (주)덤인의 정경자(50)대표는 강연자로도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정리수납 업계의 만능엔터테이너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던 주부들의 청소 영역을 하나의 직업군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던 것도 오롯이 그 덕분이다. 그에게서 교육을 받은 이들만 해도 벌써 4만명에 이르고 전문적인 강사도 4백명에 이를 정도로 정 대표는 정리수납 업계에 있어서는 ‘메시아’와 같은 존재다. 
그의 한 달 일정표가 그려져 있는 달력에는 빈 공간이 없다. 이런 현상은 최근의 일이 아니다. 몇 해 전부터 방송사, 언론사, 정부기관, 여성센터, 지방출장 등 전국 곳곳에서 그를 찾는 사람들이 갈수록 늘어나서 생긴 단면이다. 여성들의 사회진출이 많아지고 문화수준이 날로 향상되는 시기와 맞물려 정리수납이 청소 수준이 아니라 삶의 기쁨을 조율하는 기능으로 변신해가고 있다. 그가 하루를 25시로 살아가는 이유다. 인터뷰를 위해 새로 이사한 양재동 사무실을 찾았다. 그는 여전히 바쁘게 전화를 받고 있었다. 
순수함은 이성을 누르고 솔직함은 시간을 정리하며 따뜻함은 공간을 품는다. 눈은 마음의 창이다. 그가 지금 그걸 말하고 있다. 상대방의 시선을 압도하는 맑고 밝은 큰 눈에서 또 하나의 열정을 읽을 수 있다는 건 덤이다. 커리어우먼의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그에게서 웬일인지 소녀적인 감성들이 간혹 삐죽거리고 나올 때면 그만 말문을 닫는다. 그만이 가질 수 있는 잔잔한 매력이다. 대화를 주고받는 진지함과 적극적인 움직임은 상대방의 호감을 끄는 데 최고의 몸의 언어다. 자연스러움으로 뭉쳐진 대화법이 눈길을 끈다. 단지 그의 조금만한 얼굴을 뒤덮는 큰 눈에서 뿜는 강렬한 눈빛 조도는 어쩌면 많은 이들에게 보내는 강한 자신감의 표출이 아닐까. 

탁월한 기획력으로 상사들 칭찬 “이걸 자네가 했단 말이지”
2남3녀의 넷째로 태어난 정 대표는 어린 시절 지금 사회에서 보여주는 활동적인 모습과는 정반대로 얌전하고 수줍음 많이 타는 내성적인 소녀였다. 숙제 잘하고 말이 없고 조용했던 그가 변하기 시작한 건 사회에 진출하면서부터다. 국내의 한 중견 물류회사에 입사한 정 대표는 늘 그랬던 것처럼 모범적이고 조용하게 일처리 잘하는 스타일의 직원이었다. 그러나 사회, 직장은 또 다른 무대가 아닌가. 
본인이 기획하거나 처리해 놓은 일들이 대부분 윗사람이나 선배들의 공로로 넘어가는 걸 알게 된다. 혼자서 조용히 기획하고 새로운 일들을 만드는 일에 남다른 재주를 가지고 있던 정 대표는 이런 일이 반복되자 속으로 홀로 애를 태운다. 여전히 내성적인 성격 탓에 내놓고 업무를 자기가 하겠다는 말을 못하고 속으로만 끙끙 앓던 어느 날, 자리를 비운 사이 중역진이 지나가다가 그의 자리에 있는 계획서를 보고는 깜짝 놀란다. 
“아니, 이걸 자네가 했단 말인가”. 말없이 묵묵히 일만 해왔던 그를 처음으로 알아본 것이었다. 이후 시험 삼아 일거리를 직접 내려 보내는 일이 잦아지기 시작하고 만족스러운지 점점 일의 범위가 넓어져 갔다. 그는 어떤 일이 맡겨져도 싫다는 내색을 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회사의 중요한 기획이나 업무가 그에게로 떨어지는 일들이 많아졌다. 당연히 진급도 동료들보다 앞섰다. 
특히 통관서류 등 해외수출 아웃바운드를 맡을 때에는 다른 나라들과 시차도 다르고 컨테이너 하역도 들쑥날쑥해 토, 일요일 없이 근무하는 일이 다반사였지만 그는 마다않고 해냈다. 보통 남자직원들도 힘들어 하는 그런 시간대 업무였지만 그는 묵묵히 자기 일을 완수해 나갔다. 주변에서 다들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사회에 나와 처음 들어간 물류회사에서 나름대로 열심히 일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회사에서 나한테 맡기는 업무량이 점점 늘어나고 성격도 점점 외향적으로 변해갔다. 해외물류의 경우 다른 나라와의 시차로 인해 밤에도 근무해야 되고 토, 일요일에도 일이 있으면 나와서 해결해야 했다. 그러다 보니 남들보다 일도 더 빨리 다양하게 배울 수 있게 됐고 승진도 빨랐다. 5년 후에는 계열사를 하나 새로 설립할 때 기획실 일을 맡아 전반적인 업무를 컨트롤하는 자리에까지 오르고 세계적인 컴퓨터 회사인 IBM 국내법인의 물류도 수주하는 등 회사성장에 일조하기도 했다.”

▲ (주)덤인 정경자 대표 ⓒ사진 이현석 팀장

인생의 전환점, 30세 초반에 캐나다 현지법인 대표되다
물류회사에서 핵심 간부로 성장해 가던 30대 초반, 정 대표는 인생의 전환점이 될 만한 제안을 회사로부터 받는다. 사세가 확장되면서 해외에까지 진출하게 된 현지법인의 책임자로 정 대표가 갔으면 하는 것이었다. 한번 맡기면 빈틈없이 일을 처리하고 이렇다 저렇다 변명 없이 묵묵히 끝까지 업무를 추진해 내는 그의 능력을 높이 산 파격적인 결정이었다. 그는 고민하지 않았다. 30대 초반의 여성간부가 캐나다 현지법인의 대표로 전격 발탁된 것이었다. 국내 굴지의 L전자업체와 협력해 추진하는 물류사업은 회사 입장에서는 해외진출의 성공가능성을 타진하는 중요한 업무였다. 
캐나다 토론토 현지에서는 난리가 났다. 현지법인의 대표로 30대 초반의 젊은 여성CEO가 임명됐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 큰 화제였다. 보통 물류사업은 남성들의 전유물처럼 여겨질 정도로 거칠고 힘든 영역이기 때문이었다. 현지 언론들이 정 대표의 등장을 화제의 뉴스거리로 일제히 보도하면서 그는 단박에 토론토 물류업계의 기린아로 떠오른다. 그는 캐나다에 와서도 그의 일에 대한 지독스러운 일벌레 스타일의 본능을 숨기지 않는다. 그는 사업초기의 자금사정을 고려, 본사에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현지에서 발생하는 매출로 회사를 꾸려나갈 정도로 절약하고 직원들을 독려했다. 
단돈 10원이라도 아끼기 위해 회사의 운전기사가 실수로 깨버린 커피숍 간판을 보상하러 3시간을 넘게 홀로 운전하고 가 통사정을 하며 돌아오면서 흘렸던 눈물은 아마 그가 현지에서 경험한 가장 처연한 순간이었을 것이다. 어려서부터 몸에 밴 성실성과 정직성은 그의 무형의 최대자산이다. 그와 일을 해 본 사람이라면 대부분 고개를 끄덕이는 까닭이다. 그는 이곳에서 새로운 환경과 부딪히면서 회사를 차츰 안정시켜 나갔다. 캐나다에 온 지 2년쯤 지났을까. 
그의 인생에 터닝 포인트가 될 만한 장면을 보게 된다. 어느 날 캐나다에서 알게 된 지인의 초정으로 집을 방문하게 되는 자리가 마련됐다. 그런데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는 보지 못했던 묘한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이사한 집의 가구와 냉장고, 옷장, 책상 등 모든 것을 전문적으로 정리하고 수납하는 사람들이 처리하고 있는 게 아닌가. 이게 무엇인가 싶어 물어봤더니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정리수납을 돈을 주고 하다니.......”놀라운 광경에 충격
이곳에서는 정리수납을 전문적으로 해 주는 직업이 있어 자신이 직접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었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보통 본인의 집 기물들은 주부나 가족들이 치우고 정리하는 게 일반적이지 않는가. 그게 아니라는 것이었다. 이 직업을 전문적으로 하는 회사가 따로 있고 일반인이나 회사들이 이들을 이용하고 대가를 지불한다는 내용이었다. 정 대표는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 정리수납을 대신해 주고 비용을 지불한다니. 돌아오는 귀가 길에 묘한 기분이 들었다. 인터넷에 들어가 검색해 보았다. 
이미 유럽, 미국, 일본, 캐나다 등 선진국에서는 정리수납이라는 직업이 보편적으로 광범위하게 퍼져있고 실생활에서도 많이 이용하고 있다는 정보였다. 순간 머리를 스쳐가는 생각 하나가 있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서도 가능할까’ 
큰 충격파를 주었던 정리수납이라는 직업이 기억 속에서 잊혀져가고 있을 무렵인 3년차 캐나다 생활에 일대 변화가 일어난다. 협력사로 함께 캐나다에 왔던 L전자회사가 경영관리차원에서 해외투자를 중단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이내 철수를 결정해 버리는 것이 아닌가. 협력사의 철수는 정 대표가 일했던 회사에도 큰 타격을 입힐 게 뻔했다. 아니나 다를까.급한 전갈이 왔다. 한 달 내로 귀국하라는 지시였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갈등이 일었다. 다시 한국 본사에 가서 일을 해야 하나. 아니면 창업을 해야 하나. 그러나 그는 이미 자기가 맡은 일에 대해 매진한 터라 다시 일을 하기에는 마음이 무거워진 상태였다. 지친 것이었다. 그러던 중 본사가 포장이사업을 하면서 미래 사업으로 계획해 놓았던 베이비시터와 가정관리사가 진척이 되지 않고 난항을 겪고 있었다. 이미 기존 업체를 인수키로 계획까지 세워놓았으나 제자리걸음이었다. 

베이비시터 5년만에 정리수납 강의, 폭발적 인기 확인
이 일은 맞벌이 부부가 늘어나면서 아이가 홀로 남겨지는 것을 막고 여성들의 사회진출에 따른 가정을 케어 하기 위해 나온 직종이었다. 이 아이템도 사실 정 대표가 기획실에 있을 때 계획해서 보고한 내용이기도 했다. 그는 본사에 근무하는 대신 아직 인수가 확정안 된 이 업체를 대신 운영해 보겠다고 제안해 받아들여져 본격적으로 자신의 회사를 창업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진다. 인수 비용은 오천만원이었다. 그가 과감하게 창업을 할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이었을까.
“캐나다에서 사업자등록증을 직접 내봤고 언어, 문화, 식생활 등 모든 게 다른 외국에서도 사업을 잘해 냈는데 우리나라 말을 하고 식사를 하고 주변에 아는 인맥들도 있는 이곳에서 못한다는 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한국에서의 창업은 나에게 사업하기에 아주 좋은 곳이라고 생각했고 그게 또 큰 힘이 되어줬다.”
그의 나이 30대 중반을 넘어가고 있었다. 그는 베이비시터와 가정관리사의 사업을 미래 먹거리로 성장시키기 위해 10년 계획을 세운다. 세밀한 계획과 집중력 그리고 지속성은 그의 오늘을 만든 핵심 역량들이다. 베이비시터로 터 닦기 작업을 한 뒤 캐나다에서 경험한 정리수납사업을 본격화하기 위한 일종의 시나리오를 짠 것이었다. 알리는 기간을 5년 후로 설정했다. 그 이전에는 인적자원의 확보를 위해 베이비시터와 가정관리사를 많이 확보하는 게 우선이었다. 
정 대표는 새로운 아이디어로 전략을 세운 뒤 각 구청과 여성인력개발센터, 여성회관 등을 찾아다니며 자신이 만든 교육 프로그램을 제안했다. 주부들의 경력단절 현상을 막고 제2의 사회생활을 하는 데 최적의 직종이라고 홍보했다. 전국의 모든 여성관련 모임이나 단체 등을 찾아다니며 가능성을 설명했다. 발이 부르트도록 뛰고 또 뛰었다. 베이비시터나 가정관리사가 무엇을 하는 일인지 생소한 이들을 상대로 설득하고 다니길 3년쯤 됐을까. 동대문 여성인력개발센타에서 첫 연락이 왔다. 

지인들도 극력 말린 정리수납 사업, 그러나 그는 달랐다
프로그램이 통과됐다는 알림이었다. 바람이 불었다. 다른 지역에서도 강의 프로그램을 진행해 달라는 요청이 갈수록 늘어났다. 여성단체와 기관들은 베이비시터 프로그램이 여성과 주부들에게 인기가 높아 수강생들이 대거 늘어나자 고무된 표정들이었다. 정 대표는 교육받은 수강생들을 인력으로 활용할 수 있게 돼 상호 윈-윈 하는 방향으로 정착되어 갔다. 이와 함께 그는 관련 공부도 병행했다. 중앙대 보육교사 자격증을 따기 위해 1년간 매일 통학을 했고 집에 귀가해서는 TV에서 진행하는 2시간짜리 유아TV 내용을 메모하고 모아 베이비시터 강의 매뉴얼로 만드는데 활용했다. 
한번 목표를 세우면 차근차근 접근하는 방식의 계획성은 그의 최대 병기다. 그러나 초창기시절 그의 지인들은 정리수납 사업을 극력 말렸다. 어느 주부가 돈을 내고 자신의 집을 정리하겠냐는 것이 주된 이유였다. 하지만 그는 우리나라의 경제발전과 주부들의 사회진출에 주목했다. 직장에서 일하던 주부가 가정으로 돌아간다는 건 집을 치우기 위한 또 하나의 출근이 된다는 걸 파악했다. 따라서 가사노동을 대신 해 줄 수 있는 시대가 분명 올 것이라고 믿었다. 
그동안 베이비시터 교육을 받은 인원들이 2만 여명으로 늘어날 정도로 자리를 잡아가자 5년 후인 2008년도부터는 정리수납 교육도 동시에 실시했다. 그동안 자신이 공부하고 경험하면서 만든 정리수납 매뉴얼을 틈틈이 계속 보완해 왔던 것이었다. 교육을 받은 베이비시터들의 표정이 밝아졌다. 일단 집에서 한번 실천해 보고는 산만한 냉장고가 정리되고 옷장이 단정해지는 등 집안환경이 변하는 것을 경험한 것이다. 

2011년 협회 설립.....무릎연골 닳아 헤질 정도로 뛰어
이어서 고객들 집도 정리해 주었더니 서비스 질이 향상되었다고 입이 마르도록 칭찬이 돌아왔다. 그야말로 인기폭발이었다. 동대문 여성인력개발센터에서는 당장 정리수납 과정을 별도로 새로 만들자고 제안해 오기에 이르고 두 달 동안의 강의는 전국 단위의 여성인력개발센터로 빠르게 퍼졌다. 정리수납 교육 과정을 만들어 강의를 해 달라는 요청이 잇따랐다. 전국적으로 계속 교육을 해나가면서 그는 우리나라 실정에 맞게끔 정리수납 매뉴얼을 지속적으로 보완하며 교재를 완성시켜 나갔다. 
정 대표는 여세를 몰아 2011년 10월에 정리수납 교육생들을 회원으로 한국정리수납협회를 설립한다. 그리고 교육을 이수한 사람에게는 민간자격증을 발급해줬다. 정리수납 전문가를 양성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시기를 전후해 정 대표는 방송과 언론사들의 인터뷰 요청이 쇄도하기 시작한다. 경력 단절의 주부들에게 최적의 직업군이자 집안 환경변화로 삶의 질을 높이는 정리수납에 눈을 뜨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정신없이 달렸다. 방송사 패널, 정리수납 촬영, 신문사 인터뷰, 기업체에서의 강의 요청, 전국각지 여성 센터에서의 교육 등 정리수납을 전파하기 위해 모든 곳을 찾아다니고 참석했다. 지금도 통증을 느끼고 있는 무릎은 이 당시 전국을 쉴 틈 없이 다니고 10시간 이상 강의를 3~4년 동안 거의 매일하다시피 함으로써 연골이 다 닳아 생긴 훈장 같은 상처다. 그는 2012년 정식으로 정리수납 전문회사인 (주)덤인을 설립하고 더 맹렬히 돌진했다. 그리고 포장이사가 처음 도입되었을 당시를 떠올렸다. 
초창기 “누가 이걸 이용하나”하면서 시큰둥했던 반응이 이제는 포장이사 없이 이삿짐을 싸는 게 더 이상할 정도로 안착하지 않았는가. 정 대표가 앞을 내다보는 혜안이 특출 난 이유도 정리수납의 미래를 미리 읽어서다. 2013년에는 고용노동부에서 경력단절 여성들이 취업하기 좋은 직업 60개 종류에서 3위에 올랐고 2014년에도 신 직업육성 직업 40개 종류 안에 선정되는 등 ‘정리수납’ 이름가치가 고공행진중이다. 

2015년 드디어 직업사전에 등록, 가맹점도 입소문만으로 30개
2015년 2월에는 정 대표가 그토록 목마르게 바라고 뛰었던 소원이 드디어 이뤄진다. 한국직업능력개발원의 직업사전에 정리수납이 등재되는 쾌거를 가져온 것이었다. 4만명의 회원들의 자부심이 살아나는 순간이었다. 정리수납이 직업이 될 수 있냐며 고개를 갸우뚱하던 담당자의 모습이 빛바랜 필름영상 되어 오버랩 됐다. 가맹점도 입소문만으로 벌써 30호점에 달하고 있다. 내년부터는 프랜차이즈 사업을 본격화하기 위해 올해 CI와 BI를 새로 개발했다. BI는 ‘업테리어’라고 설정했는데 정리수납의 미래 명칭이다. 그리고 정리수납 전문가들을 ‘업테리언’으로 부를 예정이다. 
특히 정 대표가 심혈을 기울여 주력하는 분야는 건설회사와의 협력이다. 냉장고, 옷장 등과 마찬가지로 이제는 정리수납도 분양할  때 함께 빌트인 하도록 만드는 게 목표다. 이사하고 나서 정리한다는 게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것은 누구나 안다. 이 부분을 건설회사에서 보완해 주면 아파트에 대한 평가도 상당히 높아질 것이라는 게 그의 판단이다. 정 대표 스스로도 청라지구 ‘수자인’아파트 광고모델이기도 해 가능성이 매우 높아 보인다. 

“건설회사와의 협업 이뤄지면 대중화 빨리 올 것”
“건설회사와의 협업이 이뤄져 정리수납이 분양할 때 옵션에 들어간다면 아마 여러 면에서 큰 인기를 끌 것으로 생각한다. 이사하는 사람들의 가장 큰 고민은 짐 정리다. 경우에 따라서는 정리를 잘못하는 사람들의 경우 아파트를 잘못지어서 그렇다고 푸념한다. 이럴 경우 정리수납 전문가들이 1~2개월이 걸리는 이사정리를 단 하루 만에 해결해 주면 건설회사에 얼마나 고마워하겠는가. 이제는 아파트 분양에도 정리수납을 빌트인 해야 할 시점이 왔다고 본다.”
그는 교육아카데미에서 정리수납 전문가들을 양성하는 협회와 정리수납컨설팅전문회사 그리고 저소득층, 한 부모 가정을 찾아가 주거 환경을 개선해주는 ‘콩알봉사단’등을 운영하고 있다. 최근에는 강남 타워펠리스 관리회사와 계약을 맺고 홈서비스를 5명의 직원들이 상주하며 해주고 있을 정도로 아파트에서의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그가 작년에 펴낸 저서 ‘정리 습관의 힘’은 정리수납에 대해 그가 10여년을 현장에서 활동하고 강의하면서 모아 놓았던 자료들을 총 망라해 편집해서 낸 자기계발서 같은 서적이다. 정리하는 방법들을 나열해 논 일반 서적과는 차이가 난다. 
인터뷰가 진행되는 동안에도 계속 울리는 핸드폰에서 그의 인기와 위상이 느껴지는 듯 했다. 내년부터 본격적으로 프랜차이즈 사업에 나설 것이라는 그의 말이 무게감 있게 느껴지는 건 지금까지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던 정리수납의 직업가능성을 1%에서 적어도 90% 이상까지 끌어올린 그의 통찰력 때문일 것이다. 인터뷰 내내 그의 핸드폰은 지칠 줄 모르고 지속적으로 울려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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