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가네푸드(주) <전설의 치킨> 최창우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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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가네푸드(주) <전설의 치킨> 최창우 대표
  • 창업&프랜차이즈
  • 승인 2015.08.17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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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실과 끈기로 ‘전설’을 꿈꾸는 치킨박사의 대망론

 

▲ 최가네푸드(주) <전설의 치킨> 최창우 대표 ⓒ사진 주현희 기자, 캐리커처 원소정 작가

“어린 시절부터 겪어 온 다양한 삶의 경험들은 프랜차이즈를 위한 사전경험이었다.”
17살 때부터 가정형편으로 인해 삶의 현장인 사회에 일찍 발을 디딘 치킨 프랜차이즈 브랜드 <전설의 치킨>의 최창우 대표는 어린 시절부터 인생의 쓴맛 단맛을 다 경험한 CEO다. 그의 과거 궤적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아무리 밟아도 결코 쓰러지지 않는 ‘오뚝이’를 연상케 한다. 이런 그의 이면에는 성실함과 끈기가 크게 자리 잡고 있다. 목표로 삼았던 일들을 끝내 해내는 그가 뒤에서 얼마나 지독할 정도로 노력하는지를 알게 되면 여러 번 놀란다. 어린 학생 처지임에도 달걀 장사로 한 달에 200만 원의 매출 실적을 올리고 아무것도 모르는 직물회사에 들어가 최고의 자리에 오르기까지는 모두 그의 노력에 기인한다. 물론 건설업에 발을 들여놓았다가 일이 잘못 되어 빈털터리 신세로 전락하기도 했지만 자신에 대한 채찍질은 결코 놓아 본적이 없다. 그가 인생 4막 5장에서 손에 쥔 것은 놀랍게도 치킨 사업이었다. 가게 얻을 돈이 없어 속을 태웠던 그는 이제 40여개 가맹점이 있는 프랜차이즈 기업의 수장으로 해가 뜰 날을 벼르고 있다. 가맹본부는 갑이 아닌 을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 최 대표는 가맹점주들의 영원한 팬이다.

가슴 졸이던 브랜드 <전설의 치킨> 상표 드디어 소유하다
가슴이 뻥 뚫린 것 같다. 얼마나 가슴 졸이며 이 순간을 기다려 왔단 말인가. 자칫하면 어렵게 만든 브랜드 자체가 완전히 날아가 버릴 뻔하지 않았는가. 적어도 1년 가까이 숨죽이며 이 순간과 과정을 지켜보고 왔다. 그렇지 않아도 <전설의 치킨>이 인기가 좋아 파죽지세의 성장세 조짐이 나타나고 있는 중이다. 새 이미지의 브랜드로 오픈한 가게가 가파른 매출상승을 보이면서 향후 전망의 기상도를 밝게 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그토록 간절히 열망했던 브랜드 <전설의 치킨>이 세상을 향해 이제 포효할 일만 남았다.
12년간의 치킨사업 경력과 가맹점 40여개를 보유하고 있는 최가네치킨(주)의 사령탑 최창우 대표(54)는 얼마 전 새로 만든 브랜드인 <전설의 치킨> 상표등록 출원증을 손에 쥐고 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작년에 모든 공을 들여 콘셉트를 새로 만든 신규 브랜드 <전설의 치킨>을 사용해 직영점을 오픈했던 그는 나중에 등록을 하러갔다가 이와 유사한 브랜드가 이미 있는 걸 알고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터였다. 이 브랜드로 야심차게 오픈한 직영점이 기대이상의 실적을 올리며 승승장구하고 있어서다.
게다가 앞으로 오픈할 예정인 가맹점은 물론 기존의 매장들도 다 차례로 간판을 바꾸려는 기획을 했었는데 자칫하면 물거품이 될 수 있는 두려움이 엄습해왔다. 무엇보다 본인 스스로 그렇게 만족하고 좋아한 브랜드였는데 중도에 포기해야 되지 않을까하는 초조감도 컸다. 훗날 사세가 커지고 난 다음에 소송으로 비화될 가능성이 꽤나 높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단념하지 않았다.
그는 기존 유사브랜드의 소유권자를 수소문해 알아낸 후 끈질긴 협상과 담판을 통해 브랜드 상표권을 사오는데 성공한다. 그가 사업을 하면서 줄곧 보여줘 왔던 성공의 원천인 성실과 끈기를 통한 결과였다. 10여년이 넘는 지금까지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치킨을 만들겠다는 일념으로 오로지 맛 하나에 모든 것을 걸고 치킨 장사를 해 왔던 그가 올해 본격적으로 많은 이들과 함께 공존과 번영과 상생을 위한 가맹사업 채비를 마쳤다.

▲ <전설의 치킨> 최창우 대표 ⓒ사진 주현희 기자

작년에 리뉴얼한 브랜드 성공예감 ‘껑충’
여태까지는 맛이 뛰어나고 가맹 점주들의 마진폭이 크다는 입소문만으로 40여개의 가맹점포가 탄생됐다면 이제는 주도면밀한 프로젝트 하에 더 많은 이들과 손잡고 맛있는 치킨문화를 만들어 가겠다는 의지다. 자신의 치킨 ‘아우라’로 자금이 취약한 소자본 창업자들을 위해 전면에 나서겠다는 다짐이다. 최 대표는 과연 <전설의 치킨>을 전설로 만들 수 있을 것인가. 그를 그의 노원 사무실에서 만났다.
마음씨 좋은 이웃집 아저씨의 비주얼이 첫 대면의 생경함을 씻어낸다. 그리고 이어지는 편안한 말씨가 귀에 얹힌다. 술술 풀어내는 말주변에서 진정성이 포착되는 의미는 무엇일까. 롤러코스트의 희열과 나락의 끝자락에서 경험했던 기억의 습작 때문이 아닐까. 그만큼 거리낌이 없고 숨길게 적다는 나름의 암시다. 그래서였는지, 그는 자신을 털어놓는데 굳이 숨기려고 하질 않는다. 그것이 오히려 왜 불편할까. 너무 솔직해서일까. 하지만 오랫동안 남는 잔영이 가슴을 떠민다. 배려하고 베푸는 것이 일상화 된 이들의 동선은 후회를 남기지 않는다. 마음이 움직이기 때문이리라. 그에게서 느끼는 묘한 기류는 이것 때문일까.
최 대표는 전북 완주에서 6남매의 4째로 태어나 초등학교 4학년 때 부모를 따라 서울로 올라온다. 고추밭을 일구고 장사를 하는 부모의 넉넉지 못한 가정형편으로 인해 고교 2학년 때 살림과 동생들의 학비마련을 위해 스스로 자퇴를 하고 생활전선에 뛰어들게 된다. 리어커는 사회에 나온 17살인 그의 첫 발이 돼 주었다. 그는 리어커에 달걀을 한가득 싣고 홍은동 골목을 누볐다.

고교 중퇴하고 뛰어든 생활 현장 “계란이 왔어요”
처음에는 “계란이 왔어요. 계란 사세요”소리를 잘 못해 모기소리만 하게 불렀다. 들은 사람이 있었을까 싶을 정도였다. 창피스럽다는 생각도 함께 들었다. 하지만 삶의 현장에는 아무도 동정의 시선을 보내지 않는다. 그냥 혼자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사실은 한참 지나고서야 깨달았다. 한 2~3달 지났을까. 그는 어느새 확성기를 들고 계란이 왔다고 소리를 한참 질러대고 있었다. 달걀 30알이 들어가는 ‘한 판’을 팔면 300원이 남는다. 한 번 싣고 나오는 달걀은 300~500판이었다.
그는 보통 달걀장사 하는 사람들이 파는 것보다 2배 이상을 팔곤 해 장사를 잘하는 학생으로 불리곤 했다. 한 달이면 거의 200만 원 내외의 수입을 올리곤 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평소 다녔던 코스를 거의 같은 시간대에 꾸준히 다녔다. 나중에는 동네 아주머니들이 그가 나오는 시간대에 나와 기다리고 있을 정도로 신뢰를 쌓았다. 그는 어떤 일을 해도 성실하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부지런하고 약속을 잘 지켰다. 거기에다가 쉽게 포기하지 않는 끈기도 그의 젊은 날의 자산이었다.
달걀 장사를 어린나이에 했음에도 그는 남들의 시선 때문에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하는 믿음직스러운 모습을 보임으로써 동네 아주머니들이 많이 팔아주고 주변에 소개시켜주는 등의 도움을 받게 된다.
“날씨가 안 좋아도 매일 꾸준히 다니다보니 시간대에 맞춰 아예 동네 아주머니들이 밖에 나와서 기다리고 있을 정도로 반겨줬다. 어린 나이에 리어커 장사를 하는 게 쉽지 않다보니 안타깝게 여기고 도와주기도 했다. 한 달 평균 200만 원 정도의 수입은 집 살림과 동생들의 학비로 써 다들 대학까지 갈 수 있었다. 물론 훗날의 내 가게마련을 위해 저축도 조금씩 해 나갔다. 리어커를 끌다보니 나중에 내 가게를 하나 여는 것이 꿈이었기 때문이다.”
4년 동안의 달걀장사와 군 복무를 마치고 나온 그는 달걀으로 인연을 맺은 닭을 튀겨 판매하는 장사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최 대표는 군대 가기 전 달걀장사로 모아놓은 종잣돈으로  점포를 차린다. 그의 퍼주는 성격에 처음에는 손해 보는 듯했지만 날이 갈수록 고객들의 호응도가 높아지면서 매출이 급상승하기 시작한다. 매출도 안정적으로 올라가고 있을 즈음인 3년차 되던 해 그는 새로운 결심을 하게 된다.

자녀 위해 닭 장사 접고 직물 회사 취직하다
가게를 접기로 한 것이다. 결혼을 하고나서 아이들의 교육환경을 생각해 예전부터 아이들이 생기면 장사 대신 직장을 다닐 생각이었다. 그는 친한 친척에게 가게를 넘겨주고 광장시장에 위치해 있는 직물회사에 취직해 새로운 세계에 발을 들여 놓게 된다. 아무것도 모르는 미지의 세계에 입문했지만 그의 성실은 또 다시 빛을 발하면서 이 분야에서도 남들이 알아주는 직물 최고의 판매자로 거듭나게 된다. 그는 1000여 개가 넘는 각종 샘플들을 밤을 새워가며 분석하며 외웠다.
동남아 보따리 상인들이 찾아와 물건을 보자고 하면 재빨리 보여주고 계약을 성사시켜야했기 때문이다. 제품 식별과 놓여진 위치 파악은 절대적이었다. 근무한지 2년을 넘기면서부터는 전체 직원들 사이에서 총괄 관리를 맡을 정도로 인정받는다. 직물회사에서 최고의 위치에 올라섰을 때 건설회사 간부로 있던 친형이 일을 도와달라고 부탁을 해왔다. 결국 그는 형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고 같이 일을 하게 된다. 건설현장은 직물회사처럼 황무지나 다름없는 전혀 생소한 분야였다. 그는 이곳에서도 시간만 나면 공부했다. 처음에는 허드렛일을 주로 했지만 건설기계 단종면허부터 종합면허까지 늦도록 공부하면서 취득해 그의 몸값은 처음보다 몇 배는 껑충 뛴다. 돈 만지는 단위가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당시 건설 분야는 어음으로 인한 부도가 가장 많이 발생하는 업종 중 하나였다. 큰 회사에서 한 번 부도가 나면 하청으로 연결된 회사들이 도미노처럼 얽혀 차례로 부도가 나기 일쑤였다.
그가 건설업에 들어와 4년차 됐을 즈음 자신의 회사를 독립해 차려서 나온다. 그의 나이 37살 즈음이다. 주로 토목공사 업무 등의 수주에 집중했다. 1년 매출액이 100억 원을 넘나드는 회사로 성장했다. 그러나 회사 설립 3년쯤 됐을 때 부도를 맞는다. 건설회사가 돌린 어음이 부도가 나면서 하청업체들이 연쇄적으로 물린 것이었다. 그는 이후 민간업체 도급에서 손을 뗀 후 지방 건설 사업에 뛰어든다. 2001년 태풍 매미로 경남 함양이 쑥대밭이 되어 이를 재건하기 위해 건설업자들이 대거 몰려들었다.

▲ <전설의 치킨> 최창우 대표 ⓒ사진 주현희 기자

태풍으로 건설서 번 돈 다 날려 빈털터리로 귀향
군청이 진행하는 수해복구 작업인 관계로 결제가 양호했기 때문이었다. 그도 이 작업에 참여해 실적 3위에 오르는 능력을 보여줌으로서 주위의 부러움을 사곤 했다. 그러나 또 다른 태풍 루시로 인해 지금까지 공사해 온 수해복구가 모든 게 헛수고로 돌아가게 된다. 이로 인해 수해로 자신의 모든 것을 다 털어먹는 지경에까지 이른다.
서울로 올라온 그는 침묵했다. 42살의 중년은 고독에 잠시 잠긴다. 이제 무엇을 해야 하나. 전쟁터 같은 서울에서 무엇을 해서 아이들하고 생활을 하나. 그는 문득 광장시장 직물회사에 취직하기 전, 장사를 하다 고모에게 물려주고 손을 뗐던 닭 장사 기억이 떠올랐다. 지금 어떻게 돼 있을까. 도봉구 창동에 있는 가게에 가보니 그 곳에선 아직도 고모가 장사를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최 대표는 순간적으로 아! 이거다 싶었다. 당시 저가 후라이드 치킨이 2003년을 거쳐 2004년도에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치킨 창업시장을 휩쓸다시피 하고 있었다. 최 대표는 앞으로도 저가 치킨 시장이 확대 될 것이라고 생각하여 저렴한 치킨 가격과 부담 없는 창업 비용으로 부부가 소자본으로 창업 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기로 하였다.

40대 초반에 다시 시작한 치킨 가게, 맛은 양보 못해
최 대표는 저가 치킨이라도 맛 만큼은 남들이 따라오지 못할 정도로 최고의 질을 유지시켜야 한다는 자신만의 철학이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춘추전국시대를 맞은 치킨 프랜차이즈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서다. 그는 보증금 300만 원에 월세 50만 원의 가게를 얻어 자신의 성과 가(家)자를 넣어 최家네 치킨에 오는 사람들은 모두 최 대표와 한 가족이다 라는 생각으로 이름을 지어 <최家네치킨> 브랜드를 곧장 오픈한다. 대신 11.6㎡(3평 반) 규모의 작은 매장에 무려 1500만 원을 들여 인테리어 공사를 한다. 시장 근처여서 인테리어가 평범하면 시장 닭집으로 밖에 안 보인다는 것이 그의 논리였다.
최 대표는 가게를 오픈하는 시점에 맞춰 자신만의 고유한 맛을 만들어내기 위해 수많은 닭 가공 공장들과 전국의 맛있는 치킨 가게들을 죄다 벤치마킹하고 다녔다. <최家네치킨>만의 고유한 맛을 창출해 내지 않으면 롱런하는 브랜드로 가기 어려울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이윽고 그가 그렇게 찾아 헤맸던 매콤하면서도 향이 나는 아주 특별한 후라이드 치킨 맛을 창조해 내기에 이른다.
24가지 각종 채소와 양념으로 숙성해 고급 수제치킨의 품위를 살리고 중국에서 수입한 향신료 재료로 거부할 수 없는 향이 나게 하는데 성공한 것이었다. 2004년 9월 가게가 오픈하고 판매가 시작되자 아주 놀랍고 뜨거운 반응이 일었다. 짧은 시일 내에 마니아층을 양산할 정도로 인기폭발의 치킨으로 고객들에게 다가갔다. 특히 100% 국내산 신선육과 고급 전용유를 매일 고객들이 보는 앞에서 오전에 한 번, 저녁 8시에 한 번씩 두 번 튀겨줌으로서 청결과 맛 두 가지를 한꺼번에 잡는 능력을 선보였다.
그리고 테이크아웃으로만 판매했다. 하루 80마리의 치킨이 팔려나간 이후 꾸준히 100마리 내외가 봉투에 담겨졌다. 한달 매출이 거의 1800만 원대에 이르렀다. 11.6㎡(3평 반)에서 이뤄진 매출치고는 상당한 수준이었다.

24가지 재료로 숙성한 맛과 향으로 맛집 돌풍 가져와
“그냥 일반적이고 평범한 치킨으로는 프랜차이즈 세계에서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결국에 향신료를 접목한 절묘한 향과 24가지 재료로 숙성해 매콤하면서도 혀끝을 들뜨게 하는 맛을 창출해 냄으로써 맛집으로서의 명성을 얻자 오픈 후 6개월 뒤 66㎡(20평)으로, 2년 후에는 앞집의 매장을 인수해 132㎡(40평)으로 확충하기에 이르렀다.”
줄을 서서 사먹는 아주 맛있는 치킨 맛집이 노원에 떴다는 입소문이 꼬리를 물면서 이번에는 지인들이 가맹점을 내달라고 조르기 시작한다. 본점을 오픈한 지 두 달 만에 가맹 1호점이 오픈됐다. 역시 마찬가지로 매출이 16.5㎡(5평)에서 월 1000만 원을 기록하면서 지역의 맛집으로 자리잡아갔다. 2호점도 역시 지인의 성화에 못 이겨 1호점 한 달 후에 오픈을 하게 된다. 특이한 것은 원래 반찬 가게를 했던 아주 작은 평수인 4.95㎡(1평 반) 정도밖에 안되는 곳에 매장을 들여 놓은 것인데 예상치 않게 하루에 500마리를 파는 대박 중의 대박 가게로 떠오르게 된다. 이 곳 점주가 오래 동안 장사를 해 온 덕에 손님들 대하는 자세와 서비스가 탁월한데다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한 치킨 맛을 가져 긴 줄을 서야만 그나마 살 수 있는 매장으로 급부상한 것이다.
이렇게 입소문만으로 8개월 만에 가맹점들이 하나 둘씩 탄생해 모두 10개의 매장이 오픈될 즈음 최 대표에게 최대의 시련이 닥친다. 닭튀김 껍질 옷을 바삭하게 부풀려 고소하게 만든 일명 ‘크리스피’ 치킨이 생기면서 고객들이 크리스피 치킨을 판매하는 옆 치킨가게로 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개업 8개월만에 찾아온 최대 시련, 맛으로 이겨내다
고객들은 <최家네치킨>이 맛있다고 하면서도 새로 나온 크리스피 치킨을 먹기 위해 경쟁업소에 줄을 서며 사가기 시작했다. 하루 60만 원대를 넘나들던 매출이 어느새 10만 원까지 추락하는 참담한 현실이 이어졌다. 여기서 접어야 하나, 그냥 끝까지 손실이 나더라도 버텨야 하나라는 고민과 갈등으로 하루 밤 날 새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가 누구인가. 안 되면 어떻게 해서라도 해결하는 노력파 아닌가. 고객들이 바라는 것이 크리스피 치킨이라면 옆에 매장보다 더 맛있는 크리스피 치킨을 만들면 되지 않을까 생각한 최 대표는 크리스피치킨의 맛과 튀김옷을 만들기 위해 거의 모든 크리스피 치킨을 판매하는 매장들을 방문, 그 비결을 찾아내기 시작한다. 결국 1년이 다 되어갈 즈음 거의 같은 형태의 크리스피 치킨을 만드는데 성공한다.
치열한 경쟁이 예고되고 있었다. <최家네치킨>에는 전통의 맛으로 유명한 매콤한 후라이드 치킨이 여전히 인기를 끌고 있어 경쟁력은 충분한 상태였다. 1년 반이 지나가자 경쟁 매장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결국 가게 문을 접는다. 하마터면 본점은 물론 가맹점들도 모두 폐업의 위기에 처했음에도 이겨낸 것은 오로지 최 대표의 노력과 끈기의 작품임은 물론이다.
“치킨 사업을 하면서 일생일대의 위기로 기억되는 사건이다. 하루하루가 피를 말리는 시간이었고 얼마나 근심과 걱정을 했으면 중이염까지 생겨 귀에서 피고름이 나고 이빨이 흔들려 빠지려는 상황까지 갔겠나 싶다. 당시에는 아픈 것을 하나도 못 느낄 정도로 모든 것을 걸고 대응하는데 집중한 것 같다. 하지만 역으로 이 기간은 예전에 알지 못했던 메뉴들을 모두 접하고 만들어 보게 됨으로서 치킨의 맛 박사로 만들어 준 것이 아닌가 싶다. 도전과 응전은 동전의 양면이었다.”
최 대표는 본사의 인력 시스템이 채 갖춰지지 않은 사업초기에는 본점 영업이 끝나는 시간에 직접 계육을 숙성해 매일 새벽까지 가맹점주들에게 배송하는 등 하루 2~3시간 밖에 잠을 청하지 못하고 주방, 영업 등 1인 3역을 해왔다.

▲ <전설의 치킨> 최창우 대표 ⓒ사진 주현희 기자

물류 가공업체 직접 운영으로 가맹점 이윤 극대화 해
지금은 본사 1층에 물류시스템을 완비해 직영공장에서 직접 계육을 손질 및 숙성을 거쳐 각 가맹점에 유통하고 있다. 원스톱 직접 유통관리시스템으로 인해 가맹점들은 판매가격의 인하로 고객들의 많아짐으로써 수익구조가 많이 좋아지게 됐다. 최 대표는 작년에 브랜드명을 <전설의 치킨>으로 새롭게 리뉴얼하고 대대적인 변화를 모색해 왔다. 이어 <전설의 치킨> 이름으로 상봉동 동부시장 근처에 56㎡(17평) 규모의 직영 1호점을 오픈했는데 월 4000만 원을 넘기며 승승장구하고 있다.
특히 최 대표는 신규 가맹점주들에게 가맹비를 받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인테리어나 집기 등도 모두 원가 개념에서 제공하고 있다. 그리고 물류 가공업체를 직접 운영해 중간 마진을 모두 제거, 불필요한 비용을 감축함으로서 소자본과 개인의 창업 보다 비용이 훨씬 덜 소요되도록 시스템을 조율했다. 12년간의 직영본점 운영으로 터득한 매장운영 노하우도 매뉴얼화해 가맹점에 제공돼 초보자들도 어렵지 않게 매장을 운영할 수 있도록 했다. 특히 <전설의 치킨>은 전체 40여 개의 가맹점들 가운데 약 절반에 가까운 18개 가맹점이 성남과 광주지역에 포진해 있다.
몇 해 전 발생한 조류독감에도 불구하고 오픈한 가맹점이 대박이 나는 바람에 유명세를 타고 창업자들이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당시 다른 치킨 전문점들은 매출이 보통 70%까지 추락했었다. 이 지역은 지금도 가맹점을 내달라고 하는 이들이 있음에도 입지를 못 구해 사양하고 있는 곳이다.

‘을’이 되어 전설을 만들고 싶은 상생의 기업가
최 대표에게 프랜차이즈란 무엇일까. 왜 그는 가맹점주들과 상생을 하려들고 그들이 돈을 벌어야한다고 외치는 것일까. 그리고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려는 까닭은 왜일까.
“사슴이 우는 것은 슬퍼서 우는 것이 아니다. 동료들을 불러 좋은 먹이를 함께 나눠먹기 위해 운다고 한다. 세상을 살다보면 다양한 소리를 듣지만 소중한 것을 주위와 나누기 위해 불러 모으는 소리야 말로 가장 아름다운 소리라고 생각한다. 프랜차이즈 사업 또한 내가 만든 아이템 그리고 내가 아는 노하우들을 나누며 함께 살기위해 하는 사업이라고 믿는다. 그러기 위해서는 본사가 철저하게 갑이 아닌 을이 되어 귀를 열어 놓을 때야만 가능하다고 본다.”
그는 진정 ‘을’이 되어 프랜차이즈 세계에서 ‘전설’이 될 수 있을까. 갑이 되어있는 현재의 많은 본사 CEO들이 이 물음에 과연 어떤 대답을 할 것인가. 올해 말에 이르면 답변의 색깔이 회색빛에서 어떤 식으로든 바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올해 목표는 가맹 80호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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